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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래 진주성이야기-7)북장대(北將臺)와 원문(轅門)

 진주성 내에는 1604년 경상우병영이 설치되고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원래의 모습을 제대로 지니고 있는 건물은 아마도 북장대와 원문일 것이다.

 북장대와 원문이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대개 한옥 건물은 나무와 흙을 사용해 지었기 때문에 불과 물에 악하여 불타거나 썩기가 쉽다. 따라서 일정하지는 않지만 100~200년을 주기로 건물의 일부 혹은 전부를 해체하여 썩거나 약해진 부분을 새 재료로 교체하여 다시 짓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를 중수(重修) 혹은 중건(重建)이라 하는데 아마도 북장대와 원문도 몇 차례의 중수와 중건 과정을 거쳤으리라고 판단된다. 그 과정에 건물 모습이 변형 되었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건물의 모습이 비교적 단순하여 변형 가능성보다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북장대는 진주성 내에 있었던 네 곳의 장대(將臺) 가운데 하나로서 서장대와 더불어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 비상시에 성의 북쪽 방어를 지휘하는 곳이다. 북장대의 또 다른 이름은 진남루(鎭南樓)이다. 진남루란 남쪽에서 침략하는 왜적을 진압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지역의 성에는 보통 남쪽의 문루나 장대에 붙여지는 이름인데 진주성에는 북쪽의 장대에 붙여졌다는 점이 조금 특이하다.

 원문이란 대체 어디에 있는 문을 가리키는 말인가? 지금은「영남포정사」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2층 누문(樓門)의 원래 이름이 원문이었다. 원문은 군대의 주둔지로 들어가는 문(門)이나 장수(將帥)의 영문(營門)에 붙이는 이름이다. 따라서 진주성의 원문은 경상우병영 병마절도사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외삼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세 곳의 출입구에는 문을 여닫을 수 있도록 문짝이 붙어 있었고, 문의 좌우에는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누문의 안쪽에는 2층 누각의 이름으로 망미루(望美樓)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없다.

 원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지금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길이 아닌, 남쪽에서 비스듬히 올라가는 길이 주된 통로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말과 짐을 실은 수레가 올라가려면 경사가 완만해야 편리하기 때문이다. 원문 아래에 위치해 있었던 중영 옆으로 오르내리는 길이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만 통행이 가능했으리라고 판단된다.

 1895년 군사제도의 개편으로 전국의 병영들이 혁파되면서 경상우병영도 해산되었고 자연히 원문의 현판도 내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1년 뒤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상남도가 설치되면서 폐쇄된 우병영 자리에는 경상남도 감영(도청)이 설치되었고, 원문에는 관찰사가 집무하는 곳을 뜻하는「영남포정사」라는 새로운 현판이 붙게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니까 이 문루는 진주에 도청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건물인 것이다.

 1925년 일제에 의해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영남포정사」라는 현판은 왜 그대로 두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주목할 만한(?) 사실은 경남도청이 부산에서 창원으로 이전하면서 도청 앞 공원에 진주의 것과 똑 같은 쌍둥이 건물을 지어 「영남포정사」라는 현판을 달아 놓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옛날의 도청을 상징하는 건물이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북장대와 원문은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진주성의 영고성쇠를 지켜봐 왔던 건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재 관리 당국 뿐 아니라 시민들도 이 건물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잘 보전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할 것이다.

조창래는 역사를 교육하던 교사였다. 퇴임후인 현재는 진주지역에서 활동가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진주참여연대 상임대표와 역사진주시민모임 공동대표로 활동중이다.

조권래 기자  edit06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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